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토바 덴노 (문단 편집) === [[조큐의 난]]과 천황 권력의 추락 === 조큐 3년(1221) 5월 14일, 고토바 상황은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이었던 [[호조 요시토키]]에 대한 추토를 명령하는 인센(원선)을 내리고, 키나이(기내)를 비롯한 인근 쿠니의 병사들을 소집해 막부 토벌의 군사를 일으켰지만, 막부의 대군에 완패하고 말았다('''[[조큐의 난]]'''). 불과 두 달 뒤인 7월 9일, 무려 '''19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상경한 요시토키의 적남 [[호조 야스토키]](泰時)에 의해, 고토바 상황은 [[오키군|오키 제도]](隱岐諸島)에 유배되었고, 부황의 막부 타도 계획에 협력했던 준토쿠 상황도 [[사도섬|사도]](佐渡)에 유배되었다. 이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던 츠치미카도 상황도 스스로 자청해 토사(土佐)로 옮겨갔다. 세 명의 상황뿐만 아니라 마사나리(雅成) 친왕이 다지마(但馬)로, 요리히토(賴仁) 친왕이 비젠(備前)으로 각각 유배되었다. 여기에 재위한지 불과 3개월도 안 된 어린 [[주쿄 덴노]](당시 4세)도 폐위되었고, [[다카쿠라 덴노]]의 손자인 시게히토 왕(茂仁王)이 즉위하여([[고호리카와 덴노]]) 그 아버지로서 황위에 오른 적도 없는 고타카쿠라인(後高倉院)이 인세이를 행하게 되었다. 고토바 상황은 오키에 유배되기 직전에 출가해 법황이 되었다. 분랴쿠(文曆) 2년(1235) 봄에 셋쇼(섭정)였던 구조 미치이에(九條道家)가 고토바 법황과 준토쿠 상황의 교토 귀환을 막부에 제안했지만, 호조 야스토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메이게쓰키》는 적고 있다. [[시조 덴노]](四條天皇) 때인 엔오(延應) 원년(1239) 2월 20일, 고토바 법황은 유배지에서 죽었다. 3개월 뒤 그에게 내려진 시호는 '겐토쿠인'(顯德院)이었는데, 당시의 구게(공경)였던 타이라노 쓰네타카(平経高)의 일기인 《히라도기》(平戶記)에 따르면 호조 야스토키가 죽은 닌지(仁治) 3년(1242) 6월에 구조 미치이에가 시호를 고칠 것을 제안하여 거듭 '고토바인'(後鳥羽院)이라는 시호를 주도록 했다는 것이다. 고타카쿠라(後高倉) 황통이 단절되어 츠치미카도 상황의 아들인 [[고사가 덴노]](後嵯峨天皇)가 즉위한 닌지 3년(1242) 7월에 정식으로 '고토바인'이란 원호가 결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